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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牙箏)

by Vnuk 2022.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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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牙箏)은 한국의 전통 찰현악기이다.

본래 중국 당나라 때 등장한 악기로, 중국에서는 알쟁(軋箏, Yazheng)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이 즐겨 연주하던 찰현악기를 중국의 쟁()에 접목시켜 만들어낸 악기로 추측된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고려사에서는 아쟁을 당악기(唐樂器)이며 7줄이라고 하고 있다. 이렇듯 아쟁은 당악에만 쓰이다가 조선 성종 무렵에는 향악에까지 쓰이게 되었다.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 당나라 때에 알쟁또는 쟁이라는 악기가 있었는데, 대나무의 끝을 매끄럽게 하여 그것으로 줄을 문질러서 소리를 냈다고 전해진다. 아쟁은 이를 받아들인 듯이 보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들어 왔다고 추측 되어진다.

아쟁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는데, 그 전에도 이미 한반도에 소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때 이미 향악기로 정착된 반면, 중국에서는 점점 얼후 등 해금 계열 악기에 밀려 이제 동북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쓰지 않는 악기가 되어 버렸다.

70년대생 세대까지는 교과서의 오류로 인하여 해금을 아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아직까지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1. 연주법

기본적인 제도는 가야금과 비슷하나, 퉁기는게 아니라 현을 활대로 문질러 연주한다. 형태는 가야금과 비슷하지만, 주법은 해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에 착안해 해금과 가야금으로 합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연주할 때의 자세가 가야금과는 달리 오른쪽 끝을 무릎에 직접 얹지 않고 '초상'이라고 하는 받침에 얹어 무릎에 닿지 않게 두고 연주한다. 전체적으로 제도나 현의 굵기 등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체격이 좀 큰 남자가 하는 경우가 많다.

 

조율은 계면조에서 ------, 평조에서 ------으로 조율한다.

 

국악기 중 운지는 어려운 편이며, 안족 좌편을 눌러 음을 높히는 방법으로 연주를 하는데 가야금 등 안족이 존재하는 다른 국악기들과 달리 현이 팽팽하고 굵어 누를 때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대부분 검지와 중지를 사용해 수직으로 누르는 방법으로 운지를 한다. 안족의 위치가 거문고, 가야금과 같이 점점 오른쪽으로 쏠려 위치하기 때문에 왼손의 포지셔닝 자체도 적응하기 어려운 편이다.

 

그렇다고 오른손이 왼손보다 쉬운 것은 전혀 아니다. 현이 연주자를 기준으로 앞뒤로 움직이기 때문에 현을 좌우로 움직이는 해금과는 달리 움직이는 것 자체가 빠른 속도로 활을 켜는 것에 약하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체로 활대의 정확한 각도를 찾아야 비로소 미끌어지지 않고 맑고 깔끔한 소리가 난다. 아쟁을 처음 시작하면, 활대를 잡는 것 부터 상당히 힘든데, 활대가 무게가 있는 편이며 잡는 자세 또한 상당히 힘들 뿐만 아니라 불편한 자세에 더불어 손목의 각도까지 예민하게 신경써야 한다.

 

2. 소리

 

1) 정악 아쟁

정악 아쟁은 전체적으로 콘트라베이스같이 웅장하고 큰 소리로 국악 합주에서 최저음을 담당한다. 합주를 할 때 국악기는 대체로 중고음을 내는 편인데 이때 아쟁을 적절하게 편성해 주면 상당히 웅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다만 연주에 사용하는 활대가 개나리나무를 표백하고 다듬은 나무 막대기가 전부고, 거기에 송진을 칠해 쓰기 때문에 문지르는 소리가 다소 거친 것이 흠이다. 이 때문에 현대음악에서는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활을 쓰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거친 음색을 고유의 멋으로 보아 다시 개나리 활을 쓰는 일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아쟁의 소리는 서양의 첼로와 비교했을 때 음색이 차갑고 칼칼한 편이다. 또 해금과 비교하면 더 굵고 웅장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흔히 해금은 여성에, 아쟁은 남성에 비유하곤 한다.

정악아쟁

2) 산조 아쟁

이런 아쟁을 산조용으로 개량한 것이 산조 아쟁이다. 이 산조 아쟁은 1940년대 연주자 박상옥이 아쟁을 민속 음악 및 무용 반주용으로 개량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 있다. 산조 아쟁은 정악 아쟁의 2/3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고, 현도 가늘어 농현이나 퇴성 추성 같은 꾸밈음 사용이 비교적 쉽다. 활은 개나리 활대를 쓰기도 하고, 첼로에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말총 활을 쓰기도 한다. 음색은 웅장한 저음을 내는 정악 아쟁과는 달리 좀 슬프고 청승맞은 소리를 낸다.

 

현대음악의 경우엔 다른 국악기 뿐만 아니라 양악기와 협주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간혹 있는데, 독일 유학파인 작곡가 김남국이 주로 연주하고 있다. 이 사람은 서양음악 작곡을 전공했음에도 아쟁 명인 윤윤석에게 개인적으로 배웠을 정도로 아쟁을 좋아하고, 심지어 유학 가서 입학 시험 볼 때도 남들이 피아노 같은 양악기를 연주할 때 혼자 아쟁을 연주했다고 한다. 2002년에 독일 유수의 현대음악제인 다름슈타트 하기 국제현대음악제에도 자신이 직접 아쟁을 연주한 실내악 작품인 '화두'로 호평을 받았고, 이 곡에 감명받은 지도 교수 한스 첸더가 자신의 음악극 <조지프 추장>에도 아쟁을 편성해 화제가 되었다.

산조 아쟁

3. 구조 및 유래

나무통에 명주실로 된 줄을 매어 활로 켜 소리를 내는 구조이다. 정악(正樂) 아쟁에는 10개의 줄이, 산조(散調) 아쟁에는 7개의 줄이 있다. 활대는 개나리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진(松脂)을 묻혀 만든다.

 

중국에서 알쟁(軋箏)이란 이름으로 쓰이던 악기로 고려 때부터 당악에 쓰이던 것이 조선왕조 때에는 향악에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길이 5, 넓이 8치의 오동나무 통에 7개의 줄을 얹었다. 머리쪽의 좌단(坐團)에 있는 현침(絃枕)과 꼬리쪽에 있는 현침에 7개의 줄을 얹고 안족(雁足) 비슷한 기둥()을 버티어 놓았다.

아쟁은 전면은 오동나무이고, 후면은 밤나무이며, 상자 식으로 짜서 만드는데, 몸통이 가야금보다 크고 두껍게 짜인다. 거문고와 비슷하게 운두(雲頭, 악기의 머리 부분)는 얇고, 길이는 151.25, 너비는 24.24이다. 꼬리 부분(부들)이 아래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가야금의 줄보다 굵은 일곱 개의 줄은 모두 기러기 발 모양의 안족(雁足) 위에 올려져 있다.

깥쪽의 줄이 가장 굵어 낮은 소리가 나고, 안쪽으로 가면서 줄이 가늘어지고 그 음이 높아진다. 각 줄에서 낼 수 있는 음의 높이는 연주되는 악곡에 따라 안족을 움직여 조율할 수 있다.

 

아쟁은 국악기 중에서 유일한 저음 현악기(서양악기로는 베이스(bass)라 할 수 있다), 소리를 지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해금과 더불어 관악합주에 반드시 포함된다. 궁중음악(관현악)에서는 무용 반주에 쓰이는 삼현육각의 편성을 제외한 어느 형태의 합주곡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풍류나 가곡과 같은 민간음악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4. 연주 방법

원래는 개나리 나무로 된 활에 송진을 칠하여 줄을 켜지만, 현재는 미루나무 등 다른 나무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머리쪽 밑에는 발()이 있고 꼬리쪽 밑에는 운족(雲足)이 있다. 오른손에 활을 쥐고 줄의 현침 가까운 곳을 문질러 켜고 왼손은 식지와 장지로 기둥() 가까이 줄을 눌러 농현(弄絃)한다. 연주자 쪽에서 먼 쪽으로부터 제1, 2...하고 부르는데 가장 굵은 제1현에서부터 점차 가늘어진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조현법(調絃法)으로는 당악계 음악에선 평조(平調) 조현법이. 향악계 음악에서는 평조 조현법 및 계면조(界面調) 조현법이 있다.

 

 

5. 산조 아쟁

산조 아쟁은 20세기 이후 활발하게 성숙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었다. 1940년대에 이르러 전통음악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아쟁 실기인들의 예술 정신에서 탄생된 것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산조아쟁(소아쟁)은 일제 때 유명했던 박성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연예대감에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로는 어떤 문헌에도 산조 아쟁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가 1987년에 발간된 산조연구에 소개되었고, 그 후 1989뿌리 깊은 나무 산조전집에 소개되었다. 그런데 산조 아쟁이 개량된 과정에 대하여 기존의 문헌들은 전래 악기인 대아쟁을 곧바로 산조 아쟁으로 개량하여 사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보다는, 산조를 연주할 수 있는 가야금으로부터의 영향과 활대를 사용하여 지속음의 효과를 내고 있는 전래 아쟁(대아쟁)의 영향을 함께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가야금과 대아쟁의 이중적 개량 형태로 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산조 아쟁은 창극 반주나 무용음악에서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하는 데서 그 태생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쟁의 사용과 함께 반주 음악은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사용할 때보다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따라서 아쟁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다. 그 후 1950년을 전후한 시기는 창극의 쇠퇴기여서 반주 음악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또 다른 아쟁의 가능성을 향해 발전된 음악이 곧 정제된 틀을 갖춘 아쟁산조이며, 아쟁산조를 연주하게 됨으로써 소아쟁이라 불렸던 악기는 산조 아쟁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6. 해금과의 혼동

70년대생 세대까지가 배웠던 단일 국정 교과서에 실린 자료에 의햐면 해금의 사진 아래에 당당히 "아쟁"이라고 써 있는 오류가 있었다.

 

당시 국악계의 활동 및 영향력이 지지부진하여 이 오류가 수정 되는데 매우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오히려 시험문제에 내기 아주 좋은 부분이어서 그 사진에 이름을 대는 문제가 단골로 출제되기도 하였다. 해금이라고 쓰면 오답처리 되었고, 학교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에만 점수를 올려주어 똑같이 "해금"으로 오답한 다른 학생들은 방치하는 등의 사건 사고가 많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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