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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란?
사물놀이의 기원과 형성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물’은 불가에서 예불에 사용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악기를 말하며, 목어(木魚),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 판(雲板)을 이른다. 아침 예불이나 저녁 예불에서 이 사물을 두드려 여러 층위의 중생을 비롯한 미물에게 소리로 청하여 각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불교의 사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성격은 불분명하다. 이따금 사찰 벽에 그려진 벽화 중에 사물을 그려놓은 전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불교에서 사물을 사용한 전례는 매우 오래되었으며, 농악기와도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내력이 길다.
또한, 1978년 2월 22일 오후 7시, 서울 창덕궁 옆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제1회 공간전통음악의 밤'이 열렸는데, 꽹과리 연주자 김용배가 제안 창단하고 민속학자 겸 민속극 전승자인 심우성이 이름 지어 부르기 시작한 《사물놀이》 풍물패가 연주한 것이 사물놀이의 시작이다. 사물놀이는 가락에 집중하고, 농악 가락을 서서 연주하던 것을 바꾸어 앉아 연주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종래에 보지 못한 농악 가락의 짜임새를 극도로 몰아가면서 열광할 수 있는 면모를 사물놀이라는 신종 형태의 가락으로 만들어냈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들은 판소리 명창 김소희가 이들에게 깃발을 써주었다고 한다.
흔히 꽹과리 소리는 천둥, 징 소리는 바람, 장구 소리는 비, 북소리는 구름에 빗대며 이 네 가지가 하나로 합쳐진 사물놀이의 소리는 폭풍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2022년 기준이면 겨우 44년에 불과한 역사를 가지지만, 전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한국의 오랜 전통문화인 것처럼 알려져 취급되고 있다.
사물놀이 구성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었다. 1978년 당시 처음 구성원은 김덕수, 김용배, 최종석, 최태현이었다. 나중에 이들을 원 사물놀이패라고 했다. 뒤에 두 명이 바뀌어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김용배는 따로 나와 1984년에 국립국악원 사물놀이를 창단하였다. 그 뒤로 원 사물놀이패는 김덕수, 최종실, 이광수, 강민석으로 안착하였다.
1. 역사
본래 풍물놀이, 혹은 농악은 한국의 농경문화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전통 연희문화였다. 일반 농촌의 민중들은 풍물놀이를 통해 각종 촌락 제의(祭儀)에 활용하거나 유희 수단으로 삼아 마을 차원의 결속력을 다졌다. 또 조선 후기에 성장한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 역시, 여러 연희 과장 가운데 풍물놀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통사회에서 풍물놀이를 전승하는 두 축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농촌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점차 쇠퇴(衰退)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풍물놀이는 1966년, 무형문화재로 포함되었다. 1966년 당시, 최초로 지정된 풍물놀이는 진주 삼천포농악.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풍물놀이는 진주 삼천포농악 외에 이리, 평택, 강릉농악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들은 전부 1985년 지정되었다. 이때의 풍물놀이는 일반 촌락에서 행해지던 마을굿만이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그보다 2년 전 남사당놀이가 지정되었으나, 당시 남사당놀이는 꼭두각시 과장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국은 6, 70년대를 겪으면서 이미 농촌의 문화가 해체가 진행되던 시점이었으므로 쇠퇴(衰退)하던 풍물놀이가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이미 일제강점기 말기의 전시체제,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농촌의 인구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풍물놀이 역시 '여성농악단'과 같은 '순회공연 단체'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다시피 하면서 농업사회의 서민문화가 아니라 '유랑예인집단에 의해서 전승되는 오락'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실이 풍물놀이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7, 80년대 청년대학생 및 운동권 지식인 사이에 민족 문화재발견의 바람이 불었고 일부 젊은 국악인들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보이면서 다양한 시도를 접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를 뒤흔든 또 하나의 문화 운동인 '소극장 운동'과 접목되면서 마침내 '민속악회 시나위'라는 집단이 창설되었다. 지금의 국립 전통예술학교 출신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이러한 배경 위에 사물놀이가 태어났다. 1978년 2월,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 연주회에서 김용배(당시 '민속악회 시나위'의 객원 멤버),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이상 민속악회 시나위 단원) 등 네 사람에 의해 '웃다리 풍물 앉은 반'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처음 연주되었다. 당시에는 '사물놀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고, 연주자 또한 꽹과리의 김용배와 장구의 김덕수를 제외하면 전통 연희 종목의 전공자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는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을 단원으로 하는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연주단이 12월에 창설되었다. 바로 이들로부터 현대와 같이 중부지방의 가락을 엮은 웃다리 사물, 영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영남사물, 호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호남 우도, 호남 좌도 사물, 이 삼 도의 가락을 모두 엮은 삼도 사물이 나오게 되었다.
기존 풍물놀이의 가락들을 정리하여 4개의 가락으로 집대성한 것이 점차 대중화되면서 이들의 팀(team)명이었던 사물놀이가 하나의 장르명으로 바뀐 것이다.
1978년 최초로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연주단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들의 농악을 다루는 연주 기량은 아주 뛰어났고, 농악을 무대용 음악에 알맞게 효과적인 방법으로 구성하였다. 그래서 농악의 생동하는 음악성과 치밀한 연주 기교는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고, 해외 연주 활동을 통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3. 사물놀이 완판
1) 웃다리 사물놀이: 경기·강원·충청 일대를 남사당 방언으로 웃다리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전라도와 경상도는 '아랫다리'가 된다. 이들 지역의 대표적인 가락을 집대성한 가락이 웃다리 사물놀이다. 쩍쩍이, 칠채, 육채, 마당 삼채, 짝쇠 등의 가락이 있다.
2) 영남 사물놀이: 진주·삼천포의 풍물 가락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의 가락을 집대성한 것으로, 길군악, 반길군악, 다드래기, 영산다드래기, 별달거리, 쌍진풀이등의 가락이 있다.
3) 호남 우도 사물놀이: 전라도 서쪽 해안 지역을 우도라고 부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락을 집대성한 가락으로, 오채질굿장단, 풍류굿, 좌질굿, 양산도, 세산 조시 등의 가락이 있다. 호남 좌도 사물을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4) 삼도 사물놀이: 위 3대 가락을 모아서 하나의 악곡으로 편성한 것으로, 보통 호남 우도 대부분, 영남의 별달거리, 웃다리의 짝두름을 이어서 연주한다.
5) 설장고: 설장구의 '설'은 본디 으뜸이란 뜻으로 장구재비 중 첫 번째 장구 수란 의미로 상장 구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그 의미가 더 넓어져 장구로만 따로 연주하는 놀이의 형태로 부르기도 한다. 최초에는 4명이 연주한 것이었으나 근래에는 그보다 적은 수, 혹은 더 많은 수로도 연주한다.
6) 비나리: 굿이나 고사에서 부르던 고사 소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가락으로 경기도 일대의 비나리 가락을 위주로 한다. 사물의 연주 가락을 반주로 꽹과리 연주자가 축원 덕담이라 부르는 사설을 부르는 것이다.
7) 판굿 : 사물놀이의 주요 연주 중 유일한 선반 즉, 서서 놀이하는 형태이다.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중요한 점인 다른 연주와 달리 공연장이나 무대 위에서 악기를 메고 돌아다니며 진을 짜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형태의 놀이이다.
4. 사물놀이 각 악기의 역할
사물놀이 악기를 음양을 나누어 구분하면 쇠로 만든 징과 꽹과리는 하늘의 소리를 나타내고, 가죽으로 만든 북과 장구는 땅의 소리를 나타낸다.
1) 꽹과리는 천둥을 의미하고, 꽹과리는 덩치가 가장 작으면서 소리는 가장 도드라져서 사물놀이에서 지휘자의 역할을 맡는다.
2) 징은 바람을 의미하고, 징은 천을 뭉툭하게 감은 채로 치기 때문에 소리가 여운이 길고 풍성하다. 사물 악기 중에선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고도 본다. 장단의 머리박에 한 번씩 쳐주어 전체 가락을 푸근하게 감싼다.
3) 북은 구름을 의미하고, 북은 꽹과리와 장구가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기본 리듬을 만들어 주고, 든든한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4) 장구는 비를 의미하고, 장구는 양손에 채를 들고 치는데 높은음이 나는 쪽을 채편 또는 열편이라 부르고, 낮은음이 나는 쪽을 궁글 편 또는 궁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채를 열 채, 궁채라고 한다. 사물놀이에서는 꽹과리가 지휘를 맡지만 이를 제외하면 사실 박자의 빠르기나 시작, 그리고 끝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5. 사물놀이의 여러 형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지역 안의 풍물패라 해도 둘이 맞붙으면 은근히 가락을 바꾸거나 엇박과 변 가락을 집어넣어 소리를 어울리며 흔들며 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 몇 년간은 오히려 연합하는 추세라 그런 진풍경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각 패는 자신들에 맞는 가락으로 사물을 치기에 두 패가 만나 합동공연을 하려면 가락과 리듬을 맞추는 연습을 한다. 대학 전통예술 연구회나 대학 풍물패만 하더라도 학교마다 연주법이 달라 아직 맞붙기가 가능하다. 그러니 함부로 자신이 아는 사물 가락이 아니라고 틀리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은 뭣 모르는 행동이니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가락뿐 아니라 치는 타법이나 채모 쥐는 지법, 심지어 장구의 경우는 앉는 법까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재외 동포 사회에서는 언어는 물론 전통악기나 농악의 맥이 끊긴 곳이 많기도 하지만, 현대의 한국 사물놀이를 젊은 동포 학생들이 자신들의 민족문화로 배우는 경우도 많다. 특히 사회주의권에서는 한국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현대식으로 재정립된 한복이나 음식을 배워가는 경우도 많다.
요즘 들어서는 전통적이지만 새롭게 창안된 음악답게 사물놀이패는 관현악단과 협연하거나 재즈 밴드와 함께 공연하는 등 다양한 이색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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