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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Baroque music)

by Vnuk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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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Baroque music)

 

바로크 음악(Baroque music)17, 18세기의 유럽 음악을 말한다.

바로크 음악은 르네상스 음악이 끝난 1600년경~1750년경의 유럽 음악의 사조로 원래 바로크란 17, 18세기의 예술 양식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바로크 음악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 일은 꽤 오래되지는 않았다. 르네상스 음악의 다음 시대이며, 갈랑 양식이라는 잠깐의 과도기를 거친 뒤 고전주의 음악이 이어진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1600년경부터 1750년경의 음악에 대해서도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바로크 시대를 좀 더 세분한다면 초기·중기·후기로 나눈다. 초기 바로크는(1580~1630) 중기 바로크는(1630~1680) 후기 바로크는 (1680~1750)이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절대주의 왕정으로부터 계몽주의로의 이행을 볼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정신사적으로는 합리주의적·계몽주의적인 사조의 흐름 속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여러 사회적 상황이 몇 겹으로 겹쳐서 궁정, 도시, 교회 등 세 활동 범위를 기초로 하여 바로크 음악을 형성하였다.

바로크는 원래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 철학 용어를 거쳐 현재의 용어가 되었다.

1710년 바로크 실내악

1. 어원

 

1748년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로크 음악이라는 용어는 역사가마다 그 용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1600년부터 1750년까지의 150년 동안의 음악 양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바로크라는 단어가 건축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실제로는 173310월에 초연된 장 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라시 Hippolyte et Aricie에 대한 익명의 비평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734"프랑스의 머큐리(Mercure de France)"라는 잡지에 기재된 이 비평에서 바로크라는 단어는 이 오페라의 일관성 없고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멜로디, 계속 바뀌는 박자와 조성, 매우 빠른 곡의 진행속도를 비판하는 데 사용되었다.

 

장 자크 루소가 음악의 한 형태를 지칭하게 된 바로크 음악 (musique baroque)라는 용어가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1768년에 쓴 음악사전 (Dictionnaire de musique)에서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하였으며, 링크, 네이버캐스트 바로크(baroque)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어 단어 'barroco'에서 왔는데, '괴이한 형태의 진주', 혹은 찌그러진 진주를 말한다.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실로 루소는 이 바로크라는 말을 매우 극단적인 언어로 사용한 것이 분명해 보이며, 실제로 그가 바로크 음악을 '지나치고, 괴이하고, 부자연스러운' 음악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음악가이자 철학가인 장 자크 루소는 1768년에 쓴 자신의 책 《백과전서(Encyclopédie)》에서 ≪Baroque music is that in which the harmony is confused, and loaded with modulations and dissonances. The singing is harsh and unnatural, the intonation difficult, and the movement limited. It appears that term comes from the word 'baroco' used by logicians.

바로크 음악이란 혼란스러운 화성, 변조와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음악을 가리키는 단어다. 노래는 거슬리고 비정상적이며, 정확한 음정으로 부르기도 어렵다. 움직임도 단조롭다. 철학가들의 단어 '바로코(baroco)'에서 나왔다.

 

 

여기서 루소가 사용한 바로코라는 단어는 원래 철학가들이 삼단논법의 종류들을 외우기 위해 사용하던 단어인데, 13세기부터 불필요하게 복잡한 학문적 논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음악사학가들이 이 단어를 음악적 시대구분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이다. 커트 작스는 하인리히 뵐플린의 바로크 미학 이론에 나타난 다섯 가지 특징을 처음으로 음악적 시대분류에 적용한다. 학자들은 곧 작스가 뵐플린의 이론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인지 검토하기 시작했고, 독일의 만프레드 부코프저와 벨기에의 수잔느, 클럭스-르준 등이 작스와는 별개의 엄밀한 분석을 통해 바로크 음악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한다. 이처럼 바로크 음악이라는 용어가 동시다발적으로 제안되면서 시대구분에 대한 합의가 필요해졌다. 영국에서는 1940년에 들어서야 바로크 음악이라는 시대구분이 인정받았다.

 

1960년이 되기까지 시기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자코모 페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이 이처럼 다른데 한 시대로 분류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음악, 고전주의 음악과 명백한 차이를 분류하기 위해 바로크 음악이라는 용어가 결국에는 도입되어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2. 역사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이탈리아가 그 외 지역의 음악보다 대략 20년 정도 빠르게 발전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이탈리아에서는 1730년대에 갈랑 양식이 발생한데 비해 독일에서는 1750년까지 바로크 음악의 전성기가 계속되었다.

1960년대 중반 대중음악에서 바로크 음악의 요소를 일부 빌린 바로크 팝이라는 장르 또한 생겨났다.

 

3. 바로크 음악의 시대구분

 

1) 초기 바로크 음악

 

1640년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말기, 지오반니 드 바르디의 후원 아래에 인문학자, 시인, 음악가들은 카메라타라는 모임을 결성해 음악과 연극 등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를 이어간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극을 가장 뛰어난 종류의 예술로 보았고, 폴리포니와 기악을 거부하며 기타라 반주에 독주가 노래하는 종류의 음악인 모노디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자코모 페리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다프네(Dafne), 에우리디체(L'EurI dice)에서 선보임으로써 오페라와 바로크 음악의 시작을 알렸다.

 

피렌체에서 모노디가 발달할 때, 조반니 가브리엘리를 위시한 베네치아악파에서는 기악곡이 발달했다. 환상곡, 리 체를 카레, 칸초네 등이 여기서 발달하였으며, 이후 독일에서 온 하인리히 쉬츠가 이러한 베네치아악파의 음악을 배워 독일에 새로운 음악을 전파한다.

 

또한, 이 시대에는 폴리포니의 근음을 이루어주며 화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할인 통주저음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통주저음을 보고 파이프 오르간, 하프시코드, 류트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보이싱을 하여 베이스라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카를로 제수알도 등의 작곡가들은 자연스레 화성 진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셋 온음을 악마의 음정으로 분류하는 등 가시적인 연구 성과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음악은 선법보다 조를 기준으로 하는 조성을 따르게 되었고, 이로써 시대의 격변이 발생한다. 조성감을 위해 작곡가들은 멜로디의 진행을 넘어 화성 진행을 신경 쓰게 되었고, 조성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종지 등의 작곡기술도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은 음악적 변화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몬테베르디는 르네상스 시대의 폴리포니와 통주저음을 변용하여 프리마 프락티카와 세콘다 프락티카라는 장르를 각각 개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새로운 시도는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오르페오L'Orfeo에서 여실히 드러나 평단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몬테베르디가 바로크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화성 진행에 음악가들이 관심을 기울지면서 관용적인 화성의 사용과 관용적인 주법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류트에서는 불규칙적인 방식으로 불협화음을 끼워 넣는 방식의 주법이 등장하고, 이어 루이 쿠프랭과 장르롱 달랑베르는 쳄발로에 이러한 연주법을 도입시킨다. 이러한 영향은 이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심지어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음악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17세기 초기에는 오페라 양식을 본뜬 칸타타가 생겨났다. 시간이 갈수록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칸타타는 점점 인기 있는 장르가 되었는데, 칸타타는 오페라의 음악적 매력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오페라처럼 막대한 비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음악 또한 우아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소 편성에 높으신 분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세속 칸타타가 많이 작곡되었으나, 독일에서는 거의 예배음악으로 연주될 목적으로 많이 작곡되었으며, 타국 칸타타보다는 규모가 크며, 조금 진지한 분위기를 풍긴다.

야코보 페리의 두번째 오페라 에우리디체 초반

2) 중기 바로크 음악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절대 왕정의 시대가 됨에 따라 부와 권력이 궁중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음악의 중심도 교회에서 궁중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큰 교회 회랑이 아닌 궁중의 방에서 연주되기에 적합한 실내악이 탄생한다.

 

장바티스트 륄리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륄리는 당시 프랑스 궁정에 고용된 유일한 작곡가로, 최초의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당시 기다란 지팡이로 박자를 지도하며 지휘하였다고 전해진다. 륄리는 현악을 중심으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했는데, 이 조합은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를 거쳐 현대에도 이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1630년대에 오라토리오, 칸타타, 오페라라는 새로운 성악 형식이 등장하고, 가사와 일치하도록 멜로디와 화성을 배치하는 기법인 음화(Tone painting)가 발명됨으로써 크게 호평을 받는다. 더욱 단순하고 짧은 멜로디들이 나타나고, 쿠랑트나 사라방드 등의 춤과 어우러지는 리듬을 띄기 시작한다. 화성도 단순하고 가벼워지는데, 통주저음이 사용되던 베이스라인은 하나의 독립적인 성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화성의 사용이 단순해짐에 따라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독립적인 음악 형식으로 나타난다. 쟈코모 카리시미의 오라토리오, 프란체스코 카발리의 오페라가 유명하다.

 

또한, 이 시기에 아르칸젤로 코렐리가 새로운 바이올린 연주기법과 교수법을 개발하고, 합주 협주곡 등 오롯이 악기로만 구성된 음악들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륄리의 연주가 궁정 내부에서만 이루어진 것에 비해, 코렐리가 작곡한 음악의 악보를 유럽 전역에 출판하고 연주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코렐리는 협주곡과 트리오 소나타에서 음량을 급격하게 전환하고 빠른 악장과 느린 악장을 번갈아 배치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그의 제자 안토니오 비발디에서 이어지며 이후 소나타 양식의 규범이 된다.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독일에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가 교회 음악의 전통을 이어간다. 북스테후데는 교회에 부임하여 각종 전례에 따른 음악을 작곡하는 등 전통을 이어간다. 교회 외에서는 아벤트무지크(Abendmusik)라는 이름의 연주회를 기획했는데, 여기서 발표된 종교극들을 오페라와 동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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