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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세기의 오페라
헨델은 영국에 귀화한 뒤 영국에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자로 간주되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개혁자가 아니며 기성의 형식을 활용하면서 하나의 정점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의 오페라는 아리아에서 각개의 기분을 순수하게 추출하여 묘사함을 기초로 하고 구축적이고 정밀한 계획을 가진 이탈리아풍의 벨칸토 양식과 독일풍의 힘찬 내면 묘사를 명쾌하고 단순한 형식 속에서 결합시켰다. 18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 파가 오페라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두 스타일은 분명히 분리되어 레치타티보에서는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졌고, 정서적 표현은 아리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 결과 여러 가지의 아리아 형태가 생겨났으며 아리아가 오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작품 전체의 구성에서 균형을 잃게 되었다. 또한, 명인 예적 기교를 가진 가수가 환영받자 점차 가수의 기교 과시를 위한 오페라로 변화해 갔다. 시인인 메타스타지오와 츠에노에 의하여 비극적 스타일의 오페라에서 코믹한 요소가 분리되자 코믹 오페라는 각국에서 각각 독자적인 스타일로 발전해 나갔다. 즉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 독일의 징슈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흔히 있는 일들을 제재로 하여 단순하고 알기 쉬운 형식의 음악이 곁들여졌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가수 만능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항해 음악은 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수가 기교를 과시하거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하는 것을 배제하며 표현력이 풍부한 레치타티보나 오케스트라, 또는 코러스 등의 표현력 증대 등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표현 속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했다.
2. 베를린 가곡 악파
베를린 가곡 악파는 1753년 베를린의 변호사이며 작곡가인 크라우제의 <송가와 멜로디>로 시작되었으며, 이 곡 집에는 크반츠나 엠마누엘 바흐, 그라운들의 가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1기 베를린 악파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속 음악가들, 즉 그라운, 마르푸르크, 벤다, 키른베르거 등이 있었으며, 크라우제는 단순한 형식을 지닌 민요를 바탕으로 한 리트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의 리트는 독립된 클라비어 반주부를 갖고 있었으나 바흐는 게레르트의 종교시집을 작곡하여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제2기 '베를린악파'에서는 슐츠, 첼터, 요한 프레데릭 라이히아르트등이 대표 작곡자들이나 그들은 크로프슈토크나 괴테, 실러 등 당시의 뛰어난 시에 곡을 붙여 리트를 간결한 형식에 의한 국민적인 가곡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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